오늘날 전문 미술 분야에 비해 일상적 시각 환경이 우리에게 익숙한 상황에서 굳이 대중들이 미술을 접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적으로 미술이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모든 사람이 동의해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인은 개인적으로 미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왔고, 지금도 인류의 훌륭한 문화적 발명품 중 하나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 눈앞에 펼쳐진 다양한 이미지들과 형상들의 유희를 볼 수 없다면, 사람들의 다채로운 표정과 자세, 삶의 풍부하고 섬세한 모습들, 다채로운 물건과 구조물들, 복잡하게 얽힌 도시의 건물과 공간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의 끊임없는 변주를 볼 수 없다면 이 세상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가질까? 그리고 미술이라는 행위를 통해 이렇게 눈앞에 펼쳐지고 지각되고 체험되는 이 세상의 광경을 그려낸다거나, 표현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무미건조해질까?

우리는 육체가 가진 감각을 떠나서는 세상을 만날 수 있는 통로를 가질 수 없으며 그중에서도 시각은 어떤 감각 기관보다 탁월한 통로이다. 감각이 없으면 세상은 문을 닫고 마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현대미술의 수많은 양상을 두고 어렵다거나 난해하다는 것으로 현대사회의 시각 환경이나 현대미술의 현상을 피해갈 수만은 없는 것이다.

오늘의 미술이 미술 외의 객관적 사물만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미술이 미술의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에 난해하다거나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미술이 단순히 객관적인 사물이나 상황을 보여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그렇게 어렵거나 난해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아무런 형체가 없거나 기존에 알고 있는 형상을 넘어서는 왜곡 또는 현대미술에서 흔히 목격되는 이미지의 결합을 만나면 금방 난해하다고 느끼게 된다. 모방을 통한 재발견이라는 전근대적 예술 이해의 모델이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여기서 현대미술은 어렵다, 난해하다는 말이 나온 것이라 본다.

현대미술의 난해성은 현실의 모방을 통해 현실을 알게 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이 가진 자체의 논리를 모방하고 밀고 나간 것에서 기인하고 있다.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미술 자체의 문제, 미술이 가진 시각적 독자성을 미술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미술을 창작하는 것이 오늘의 미술이다. 그러나 미술 현실이라는 것이 미술만의 것일 수는 없다. 그곳에는 항상 현실이 배경에 깔려있다. 현실을 비판하고 감시하고 성찰하게 하는 것이란 이런 배경 때문이며, 미술이 우리에게 힘을 가진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 해석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에 그 힘이 무엇인지, 힘이라는 게 있는지를 의심하게 되고 미술이 미술의 논리에만 빠져 전문화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도 갖게 된다. 사실 그런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미술이 미술논리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곧바로 난해성이나 잘 모르겠다는 것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미술이 현실의 모방으로 현실을 구체적으로 내보이거나 실증적인 앎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이해만 있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술 감상도 어느 정도 미술에 대한 이해와 교양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며, 전문화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미술이 대중적인 이해에 바탕을 둔 일방적인 요구에 부응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쨌든, 현대미술의 다양한 양식과 실험, 전근대적인 미술의 기능이나 목적을 넘어 확장된 모습들은 일반적으로 난해함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런 배경을 이해하게 된다면 현대미술이 결코 난해한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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