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엘라의 畵音] 계절과 사랑은 바뀐다, 겨울에서 다시 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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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엘라의 畵音] 계절과 사랑은 바뀐다, 겨울에서 다시 봄으로
  • 아트뉴스
  • 승인 2021.02.1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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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프라고나르 작 '구애' '밀애'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듯 사랑도 변한다. 첫 만남에서부터 익숙해지기까지 사랑은 계절처럼 그 모습도, 온도도, 느낌도 조금씩 그 형태를 달리한다. 봄에 싹트는 새싹처럼 돋아나고, 여름의 뜨거운 태양처럼 들끓고, 가을의 추수처럼 결실을 맺고, 겨울의 난로처럼 따듯하게 지난 계절을 회상하는, 사랑은 그렇게 사계와 닮았다. 사랑의 이런 모습을 그린 화가가 있다. 바로 로코코의 대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nard, 1732-1806).

프라고나르는 '사랑의 단계'라는 연작을 그린다. '구애', '밀회', '화관 쓰는 연인', '연애편지'로 이루어진 이 연작은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귀족들의 연애 장면을 여러 상징을 이용해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구애'에서 나타나는 큐피드는 앞으로 이들이 사랑에 빠질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밀회'에서는 비너스가 큐피트를 막아서 이들의 사랑이 아직 이루어 질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한다. 마치 누군가의 눈을 피해 만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장면은 사랑에 빠진 남녀가 참지 못하고 서로를 갈구하는 듯 하다.

'화관 쓰는 연인'에서는 마침내 이들의 사랑이 이루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화관은 이들의 결합을 의미하고, 이들 앞에 한 화가가 사랑의 증인이 돼 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연애편지'에서는 서로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다시 읽으며 서로에게 열정적이었던 시절을 회상한다.

프라고나르의 작품은 사계를 음악에 담아낸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의 음악을 떠올리게 한다. 그림에 이야기를 담은 프라고나르처럼 비발디 역시 음악에 이야기를 담았다. 각각의 계절에는 시와 묘사가 적혔다.

 

왼쪽부터 프라고나르 작 '화관 쓰는 연인', '연애편지' 

 


'봄'에서는 새들이 지저귀는 따뜻한 봄의 한가로운 풍경과 물의 요정이 춤을 추는 광경을, '여름'은 뜨거운 태양 아래 지친 사람들과 휘몰아치는 바람과 우박 등을 묘사하고 있다. '가을'에서는 수확의 기쁨을 노래하고, '겨울'은 얼어붙은 추운 계절과 집안의 따뜻한 난로, 그리고 겨울의 기쁨을 담고 있다. 비발디는 이렇게 마치 그림을 그리듯 상세하게 계절을 묘사했다.

비발디는 작곡가이자 사제였다. 1703년, 25세에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여자 고아원 겸 음악학교인 베네치아 피에타 고아원의 사제가 된다. 이곳에서 그는 소녀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고 이들이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을 작곡했다. 비발디는 죽기 1년 전인 1740년까지 이곳에서 일했는데, 기악작품 약 500여 곡과 오페라 40여곡을 작곡하는 등 다작과 더불어 많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음악에 열정적이었던 비발디는 정작 사제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 같다.

“빨간머리 사제”라는 별명을 가졌던 비발디는 사제라는 신분에 맞지 않게 미사를 빼먹기 일쑤였으며 메조 소프라노 안나 지로와의 염문설에 휩싸이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는 몸이 약한 자신을 안나의 언니가 잘 보살펴준다는 이유로 안나 지로와 그의 언니와 함께 살기도 했다. 게다가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실력을 갖췄던 안나를 오페라 무대에 세우기를 고집하는 등 의심을 더 할 행동도 뒤따랐다. 비발디는 당시 유행했던 오페라 사업에도 뛰어들었는데, 당시 비평가 골도니는 "바이올린 주자로서는 만점, 작곡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사제로서는 영점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사제라 하기엔 너무도 세속적인 모습을 보였던 비발디. 그가 사제였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았던 것처럼 프라고나르도 처음엔 역사화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1752년 로마대상을 수상하는 등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프라고나르는 1765년 살롱 전에 '코레수스와 칼리로에'를 출품했는데 이를 계기로 아카데미의 회원이 됨과 동시에 루이 15세의 왕궁에 작품이 걸리게 되는 영광을 누린다. 이에 그는 역사화를 되살릴 대가로 각광을 받았으나 프라고나르는 그 길을 걷는 대신 가벼운 세속적 에로티시즘을 표현한 화풍을 택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역사화보다는 귀족들의 주문이 많고 당시 유행이던 연애풍속화가 더 많은 돈이 되는 것이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프라고나르 작 '그네'

 

 


프라고나르의 대표작 '그네' 역시 한 남작이 정부의 집에 걸어두기 위해 주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네를 타는 여인의 치마 속을 들여다보는 젊은 남자, 남자를 향해 신고 있던 신을 벗어 던지는 여인, 그리고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네를 밀고 있는 고령의 신사. 사랑의 유희와 에로티시즘을 유머러스하고 우아하게 그려낸 이 작품으로 그는 큰 인기와 명성을 얻게 된다.

경쾌하고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비발디와 프라고나르의 작품들. 하지만 이들의 인기는 유행의 변화로 오래가진 못했다. 프라고나르의 '사랑의 단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루이 15세의 마지막 정부였던 뒤바리 부인의 주문으로 만들어진 이 그림은 완성 이후 다시 프라고나르에게 돌려보내게 된다. 그림에 등장하는 남녀가 루이 15세와 뒤바리 부인의 관계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지만 그보다 당시 로코코 풍의 그림이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이라는 설이 더 유력해 보인다.

뒤바리 부인이 그림을 걸고자 했던 건물이 당시 새로운 유행인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프라고나르의 그림은 어느덧 시대에 뒤떨어진 작품이 되어 버렸고 1798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그를 후원했던 귀족들은 사라져버린다. 화려한 향락을 그렸던 화가는 결국 붓을 놓게 되고, 잊힌 채 가난하게 죽는다.

비발디 역시 말년에 피에타 고아원을 떠나 비엔나로 가게 되는데 자신을 후원했던 찰스 6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후원이 끊기고 만다. 유행이 바뀌면서 그의 음악은 더 이상 주목 받지 못했고 재산을 모두 탕진한 그는 빈곤 속에서 객사, 빈민 묘지에 묻히게 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인생은 그렇게 바뀌어 간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건만 이들에게 봄은 다시 오지 않는 듯 했다. 이들이 죽고 이들의 그림과 음악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화려하고 경쾌한 작품에 대조되는 이들의 죽음은 우리에게 인생은 덧없는 것이라고, 그저 그렇게 계절 따라 바뀌어가는 것일 뿐이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이들의 작품이 재조명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다. 비발디의 음악은 바흐를 탐구하던 과정에서 같이 발견돼 조명을 받았고 프라고나르의 작품 역시 19세기 인상주의 시기에 재평가되면서 '로코코의 대가'라는 명성을 되찾게 된다.

계절은 돌고 돈다. 그리고 반드시 봄은 다시 온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와 안토니오 비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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