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대구탕을 먹다가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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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대구탕을 먹다가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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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탕. 조성관 작가 제공

얼마 전 하도 답답해 아내와 부산을 1박 2일로 다녀왔다. 부산에서 네 끼를 먹었는데, 우연히 그중 두 끼가 대구(大口)였다. 저녁은 해운대 달맞이길에 있는 유명한 대구탕집에서 푸짐한 대구탕을 정말 착한 가격에 맛보았다. 감동이었다. 이런 맛집을 기다리지도 않고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코로나 '덕분'이었다. 뽀얀 국물의 담백함과 쫄깃한 대구살의 식감은 지금도 혀끝에서 맴도는 듯하다.(나중에 이 대구탕이 건대구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돌아오는 날 점심은 생선구이가 먹고 싶어 자갈치시장으로 갔다. 생선구이 전문식당에서 모둠 생선구이를 시켰다. 갈치, 서대, 열기, 그리고 정체불명의 생선토막이 나왔다. 갈치와 서대와 열기는 외양으로도 쉽게 알 수 있었는데 생선토막은 맛으로는 식별이 힘들었다. 우윳빛처럼 뽀얗고 아삭거리는 두툼한 생선 살을 발라 먹으며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생선이 뭘까. 아내에게도 물어보았지만 모르겠단다. 이름도 모른 채 미식을 즐긴다는 게 제 살을 내준 생선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종업원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구 뽈때기살입니다."

대구뽈때기탕은 몇 번 먹어보았지만 대구뽈때기살 구이는 처음 맛보는 것이었다. 네 종류의 생선 중 최고는 단연 대구뽈때기살이었다. 담백하면서도 식감도 좋고 맛이 깔끔했다.

오래전 부산 출신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스쳤다. 부산사람들은 서울에서 어지간해서 식당에서 생선구이를 시켜 먹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생선이 싱싱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도 그럴 만 했다.

나의 최애 메뉴 중 하나가 생선매운탕이다. 생선살과 무와 채소에서 우러나오는 그 깊은 국물 맛을 좋아한다. 그런데 대구탕의 경우 나이가 들면서 어느 순간 매운탕에서 지리로 바뀌었다. 대구살을 고추냉이를 살짝 푼 간장에 찍어 먹을 때마다 대구와 얽힌 이야기들이 머리를 스치곤 한다.

 

 

19세기 아이슬란드에서 염장한 대구를 건조하는 모습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제공

 

 


아이슬란드는 왜?

대구전쟁(Cod War). 학창 시절 인문지리 시간에 처음 들어보았다. 대구라는 생선을 놓고 영국과 아이슬란드가 전쟁을 벌였다!

아이슬란드는 1958년부터 1976년까지 모두 세 차례 영국과 함포 사격을 주고받는 전쟁을 벌였다. 세계사에 길이 남는 대구전쟁이다. 이 전쟁은 배타적 경제수역(EZZ) 200마일을 탄생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을 껴안고 8개월이 눈으로 뒤덮인 북위 65도의 나라 아이슬란드! 오죽하면 나라 이름이 아이슬란드일까. 인구 34만명, 유럽의 소국 중 소국인 아이슬란드는 어째서 강대국 영국과 맞짱을 뜨겠다고 결심했을까.

대구는 유럽인의 주식 중 하나다. 찬물을 좋아하는 대구는 북대서양과 북태평양이 주요 서식지다.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와 같은 북유럽 국가에서 대구잡이를 주로 한다. 페로(Faroe) 제도는 아이슬란드와 영국 사이에 있는 섬나라.

 

 

 

 

북대서양 대구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아이슬란드는 대구잡이가 주산업이다. 대구는 버릴 게 없는 생선이다. 몸통은 소금에 절이고 남은 알, 창자, 아가미로 젖갈을 만든다. 대구를 염장할 때 빼낸 간(肝)은 따로 모아 대구 간유(肝油)와 의약품 원재료로 쓴다. 대구껍질로는 지갑도 만든다. 대구 간유는 철분이 부족한 사람에게 딱이다.

그런데 영국 어선이 아이슬란드 앞바다까지 와서 대구를 싹 잡아가자 아이슬란드 정부가 사생결단을 내렸다. 어업구역을 기존의 4해리에서 12해리(22.2km)로 확대 선포하면서 양국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대항해시대와 말린 대구

몽골계 원주민의 땅인 아메리카에 처음 상륙한 민족은 10세기 바이킹족이다. 일확천금의 야심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5세기가 앞선다. 항해술과 고기잡이에 뛰어난 바이킹족은 본거지인 노르웨이에서 출발해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거쳐 캐나다에 도착했다. 그린란드에서 가장 가까운 아메리카 대륙이 캐나다 뉴펀들랜드다. 바이킹족은 일확천금의 꿈으로 '신대륙'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구를 잡으려 대구 떼를 쫓다 보니 그린란드를 거쳐 캐나다에 이르렀을 뿐이다. 바이킹족은 뉴펀들랜드에 오랜 기간 거주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바이킹족은 뉴펀들랜드를 '신대륙'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 광활한 땅에 바이킹의 유산은커녕 이렇다 할 문명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신대륙 역사에서 퇴장한다.

노르웨이 ▷ 아이슬란드 ▷ 그린란드 ▷ 뉴펀들랜드.

이 바이킹족의 항로는 북대서양 대구 떼의 서식·이동 경로이기도 했다. 군집성 어종인 대구는 찬물의 얕은 바다를 좋아한다. 30~50m 수심이 얕은 바다가 대구의 놀이터다. 길이가 1m에 이르는 물고기가 얕은 바다를 떼 지어 다닌다! 뱃사람 입장에서는 이보다 고마운 생선이 또 있을까. 바이킹족은 무리를 지어 다니는 대구 떼를 쫓다가 우연히 신대륙 북단 끄트머리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노르웨이의 한 덕장에서 대구를 건조하는 모습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서양인에게 대구는 생선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지금부터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 연결된 무수한 이야기들을 따라가 본다.

대구가 유럽인들의 주식으로 자리 잡은 데는 종교적인 이유가 작용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금식일, 사순절 같은 날에는 '붉은 식품'을 금했다. '붉은 식품'은 소, 양, 돼지 같은 고기를 말한다.

육식이 금지된 날이 일 년 중 절반에 달했다. 하지만 차가운 식품은 허용되었다. 생선은 차가운 식품으로 분류되었다.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려면 생선을 먹어야 했는데, 대구가 가장 흔한 생선이었다.

대구를 잡아 매달아 놓으면 그 부피가 5분의 1로 줄어들면서 마른 장작처럼 단단해진다. 말린 대구는 뱃사람들에게 바게트 같았다. 바게트를 뜯어먹듯 말린 대구를 찢어 오물오물 씹어먹으면 감칠맛과 함께 포만감을 준다.

대구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전개되는 대항해시대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 최소 수개월에서 일 년 이상이 걸리는 항해에서 중요한 게 식량과 물의 확보였다. 상할 염려가 없이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식량. 대구는 지방이 거의 없어 말리기만 하면 뱃사람들의 식량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우리 조상들도 대구를 즐겨 먹었지만 대구를 말려 뱃사람 식량으로 쓸 생각은 하지 못했다. 먼 바다로 나갈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500년 동안 바다는 절벽이었고 낭떠러지였다. 육지에서 배가 보이는 데까지만 나가 물고기를 잡았을 뿐이다.

다시 인문지리 수업 시간으로 돌아가 본다. 세계 4대 어장(漁場)을 학생들은 달달 외웠다. 뉴펀들랜드 어장, 북대서양 어장, 북태평양 서안어장(베링해, 오츠크해), 북태평양 동안 어장(알래스카).

북대서양 어장과 뉴펀들랜드 어장은, 앞에서 살펴본대로 대구의 천국이었다. 대구는 꽁치 같은 어류를 포함해 무엇이나 잡아먹는 포식성 어종이면서 번식력도 탁월하다. 대구 암컷 한 마리가 200~300만개의 알을 낳는다.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는 파리에서 알아주는 미식가였다. 대구 요리를 좋아한 뒤마는 대구와 관련 흥미로운 글을 남겼다.

"만약 대구 알들이 모두 부화해서 자란다면 단 3년 안에 바다가 꽉 차 발을 바닷물에 적시지 않은 채 대구등을 밟고 대서양을 건널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여기서 캐나다 북대서양의 작은 주 뉴펀들랜드(New Foundland) 어원을 따져본다. 문자 그대로 새롭게 발견한 땅이다. 1497년 영국왕의 명을 받고 새로운 무역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항해를 시작한 존 캐벗은 한 달 여 만에 낯선 육지를 발견했다. 새로 발견한 '낯선 육지'가 그대로 이름이 되었다. 앞바다에는 대구가 바글바글했다. 뉴펀들랜드 어장은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매사추세츠 주의사당 천장에 걸려 있는 '신성한 대구' 조형물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대구는 지명으로도 남았다. 17세기 초 청교도들이 대서양을 건너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 케이프 코드(Cape Cod)다. 매사추세츠주에서 대서양으로 뻗친, 낚싯바늘처럼 생긴 반도가 케이프 코드다. 만안에 대구가 들끓었다. 뉴잉글랜드의 초기 이민자들은 강추위에 먹을 게 없어 겨울을 겪을 때마다 인구의 절반가량이 죽어 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말린 대구 덕분이었다.

대구는 미국 독립전쟁의 '배후 조종자'였다. 영국은 식민지 뉴잉글랜드에 당밀과 차에 세금을 매기고 대구 수출을 제한했다. 이에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반발하면서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실제로 1782년 영국과의 평화협상에서 미국의 대구 어업에 대한 권리가 쟁점이 되었다.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대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매사추세츠 주의회 의사당에 가보면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다. 의사당 천장에는 커다란 대구 조형물을 매달아 놓았다. 이름하여 '신성한 대구'(Sacred Cod)다.

드물지만 우리나라에는 배 위에서 대구를 회로 떠먹어본 사람들이 있다. 대구회의 맛은 도토리묵 같은 식감에 어떤 맛을 느낄 수 없는 무미(無味). 살점은 반투명한 하얀 색깔에 무지개색이 비친다고 한다.

유럽인의 식생활은 대구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바칼라,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바칼라우, 영국의 피시 앤 칩스, 노르웨이의 퇴르피스크와 루트피스크, 아이슬란드의 대구머리찜 ···. 바칼라우는 소금에 절여 말린 대구의 염분을 제거해 만드는 요리다. 포르투갈에는 대구요리법이 천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바이킹의 음식이라 불리는 퇴르피스크는 말린 대구로 만드는 요리다.

해외여행이 해금되면 먹어보고 싶은 음식 리스트가 점점 늘어만 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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