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우향 박래현에서 난네를 모차르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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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우향 박래현에서 난네를 모차르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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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의 '노점'(1956)


부끄러운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 60이 될 때까지 그의 이름 석자는커녕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니. 정말 창피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신문사에서 한 세대 동안 글밥을 먹은 사람이, 교양인의 인생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문화예술과 관련된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이.

조선일보 4월23일자 허윤희 기자의 칼럼 <'신사임당'이라는 굴레>를 아침에 처음 접했을 때 '어 이거 무슨 글이지'했다. 이따 읽어야지 하고 표시해 둔 다음 저녁 먹고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뒤통수를 망치로 쿵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기자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 전시 중인 '박래현, 삼중통역자'를 보고 화가인 우향(雨鄕) 박래현의 삶과 작품세계를 짧은 글로 풀어냈다. 전시회 제목을 보니 작년 언젠가 덕수궁 앞을 지나다 전시 포스터를 본 것도 같았다. 무지한 나는 그때 박래현이 3개국어를 통역한 사람쯤으로 생각했었다.

 

 

 

부부화가인 우향 박래현(왼쪽)과 운보 김기창(청작화랑 제공) 

 

 


화가 박래현(1920~1976). '노점' '봄C' '여인' '이른 아침'…. 박래현은 운보 김기창(1913~2001)의 아내다. 원고지 200장짜리 운보 인터뷰도 오래전에 읽었건만 그의 배우자이면서 화가인 박래현 이야기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새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칼럼의 한 대목을 읽어본다.

'시기별 변곡점을 찍으며 그의 작품은 진화를 거듭한다. 이 모든 게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다. 1960년대 초반 형체를 지우고 색으로 에너지를 분출한 추상화 작업부터 박래현의 진가가 본격 발휘된다. 구불거리는 황금빛 띠에 가득 찬 생명력과 동양화 특유의 먹물 번짐 기법이 결합해 마치 수공예자가 짜낸 직물 같은 추상 회화를 만들어냈다. 쉰 나이에 떠난 미국 유학에선 판화라는 낯선 매체에 도전한다…1974년 귀국 판화전에서 발표한 작품들은 초보 단계에 머물던 한국 판화계에 새로운 시야를 열어줬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박래현은 1948년 청각 장애 화가인 김기창과 결혼한다. 화가 부부는 4남매를 둔다. 1956년 박래현이 '노점'으로 국전(國展)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화단의 정상에 올랐을 때도 한국 사회는 그를 화가로서 조명하지 않으려 했다. 남편에게 구화(口話)를 가르치고 4남매를 훌륭하게 키워낸 여성상(像)의 울타리에 가두려 했다. '현모양처 박래현'의 프레임을 씌웠다.

부부는 화실을 나누어 썼다. 그에게 운보는 최고의 경쟁자였다. 하지만 세상은 운보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췄고, 그는 철저하게 그늘에 가려졌다.

'신사임당' 역할과 함께 일에서도 성공하려 몸부림쳤던 화가 박래현. 박래현의 삶을 접하다 보니 여성 몇명이 잇달아 떠오른다.

 

 

 

 

 

이성자 화백.(이성자 재단 제공)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대표 이성자

먼저 화가 이성자(1918~2009). 1951년 프랑스로 건너가 평생을 프랑스에서 활동하다 2009년 남프랑스에서 타계한 화가.

박래현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는 비슷했지만 이성자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 자기 세계를 구축한 경우다. 1935년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8년 짓센(實踐)여자대학을 졸업했다. 귀국 후 의사인 남자와 결혼해 세 아들을 두었으나 1951년 성격 차로 갈라선다.

1950년대는 이혼녀를 손가락질하고 엄혹한 성차별이 만연하던 시절. 그는 '현모양처'를 포기하고 화가로 홀로서겠노라 결심한다. 화가로 성공하는 길만이 진정 자식들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을 배우려면 파리의 하늘 아래로 가야 했다. 1951년 단신으로 일본을 거쳐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프랑스어를 익힌 뒤 1953년 파리 몽파르나스의 '아카데미 그랑 쇼미에르'(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에 입학한다. '아카데미 그랑 쇼미에르'는 19세기 파리에서 진보적인 학풍으로 여성과 외국인의 입학을 허용했다. 이성자는 이 아카데미에서 회화와 조각을 배웠고, 이후 자연스럽게 추상 미술에 빠져들었다.

그때 파리에는 권옥연, 김흥수, 김환기, 남관, 이응노 등이 그림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들과 교유하며 이성자는 첫 개인전을 1956년 프랑스 오베르뉴에서 열었다. 두 번째 개인전이 1958년 파리에서 가졌다. 그가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김환기, 남관, 이응노와 함께 한국 대표로 선발되면서다. 한국 여성 화가가 프랑스 화단에서 당당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한국 미술계는 놀랐다. 1981년에는 프랑스와 한국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연다. 프랑스로 건너간 지 30년 만이다. 이후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개인전을 수차례 가졌다. 그는 1992년 남프랑스 투레트에 은하수(Rivière Argent)라는 아틀리에를 지어 이곳에서 작업을 했다. 2001년에는 재불(在佛) 50주년 기념전이 프랑스에서 열렸다.

이성자가 파리에서 '아카데미 그랑 쇼미에르'를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19세기~20세기 파리에서 이름을 알린 외국 출신 예술가들 중 상당수가 이 아카데미를 거쳐 갔다. 또한 모딜리아니와 고갱의 아틀리에가 이 아카데미 바로 옆에 있었다. 모딜리아니가 잔 에뷔테른을 만난 곳이 바로 이 아카데미다.

 

 

 

 

 

1853년의 클라라 슈만.(위)와 1989년부터 유로화가 도입되기 전인 2002년까지 독일에서 발행된 100마르크 지폐의 클라라 슈만 초상 /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대조적인 버지니아 울프와 클라라 슈만

다음은 버지니아 울프(1882~1941)다. 이성자가 프랑스 땅을 밟기 10년 전 하늘 계단을 밟은 작가. 버지니아의 아버지는 저명한 저술가였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아들은 대학에 보냈으면서도 딸은 대학교육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총명한 두뇌를 타고난 버지니아는 대학 강의실이 아닌 아버지의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버지니아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상처가 있었다. 의붓오빠들로부터 당한 성학대. 이 트라우마로 인해 남자를 멀리한다. 하지만 오빠 친구인 레너드 울프가 그녀를 남달리 보고 청혼한다.

나도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 하지만 성 관계는 싫다. 나는 글만 쓰면서 살고 싶다. 당신이 도와줄 수 있겠느냐. 레너드는 이 '황당한 조건'을 받아들인다. 출판사를 차려 아내의 소설을 전속으로 출판한다. 버지니아는 남편의 보호 속에 오로지 집필에만 전념한다. 샬롯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이후 영국 최고의 작가가 된다. 버지니아는 '자기만의 방'에서 이렇게 썼다. "만일 셰익스피어에게 견줄만한 재능을 타고난 누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녀도 셰익스피어처럼 대문호가 될 수 있었겠나?"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세기 독일에서도 비운의 여성 음악가를 만나게 된다. 나는 리하르트 바그너를 취재하러 들른 드레스덴에서 뜻밖에도 클라라 슈만(1819~1896)을 만났다. 1849년 드레스덴에서 바쿠닌이 주동한 무장폭동이 일어났다. 바그너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바쿠닌의 선동에 넘어가 직간접으로 관여했다. 슈만도 연루될 뻔했으나 아내 클라라의 현명한 처신으로 목숨을 건졌다. 클라라는 무장폭동을 일기에 기록했다.

얼마 전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로베르트 슈만 연주회를 가졌다. 그 리뷰 기사를 읽으면서 클라라 슈만이 퍼뜩 생각났다. 클라라가 없었으면 슈만이 있었을까.

클라라는 슈만의 스승 프리드리히 비크 교수의 딸. 클라라는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열살 때 피아니스트로 데뷔한다. 열한살 때 서유럽 연주여행을 다닌다. 18세기 모차르트처럼.

파리에서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와 협연을 하기도 했다. 파리에서 활동 중이던 쇼팽은 클라라의 연주를 극찬했다. 클라라는 작곡에도 재능을 보였다. 열일곱 살에 작곡한 곡을 당대의 음악가 멘델스존이 초연했을 정도다.

1840년 클라라는 부모의 반대에도 슈만과 결혼한다. 슈만은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클라라는 남편을 성공시키려 헌신한다. 클라라는 슈만의 뮤즈(Muse)였다. 슈만은 명곡들을 쏟아냈다. 클라라는 7남매를 키우는 틈틈이 남편의 작품들을 연주했다. 요즘 말로 '슈퍼맘'이었다. 부부의 결혼 생활은 슈만이 정신질환을 앓기 전까지 14년간 지속됐다. 결혼 생활 동안 클라라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작곡을 하지 못한다. 남편과 사별 후 자식을 돌보며 클라라는 음악으로 생계를 꾸린다. 남편의 작품들을 연주했고, 작품 해설가로 활동했다.

 

 

 

 

 

1780년의 모차르트 가족 초상화. 왼쪽부터 난네를, 볼프강, 어머니(벽면 초상화), 아버지 레오폴드 /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우리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도 성차별에 희생된 한 여성을 만나게 된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누나 난네를 모차르트(1751~1829)다. 잘츠부르크 궁전의 궁정악장이었던 아버지 레오폴드는 딸이 일곱 살이 되자 하프시코드(피아노 전신)를 가르친다. 딸은 하프시코드를 금방 배웠다. 다섯 살 아래인 남동생 아마데우스도 누나처럼 하프시코드를 배웠다. 남매의 연주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자 아버지는 남매를 데리고 빈, 파리 등으로 연주여행을 시작한다. 남매는 가는 곳마다 박수갈채를 받는다.

난네를이 열여덟이던 1769년 아버지는 돌연 연주 여행에서 딸을 제외한다.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었다는 이유에서다. 동생이 이탈리아 도시를 여행하며 경험을 쌓아가고 있을 때 난네를은 어머니와 잘츠부르크에 머물러야 했다. 작곡 능력도 있던 난네를은 더 이상 재능을 펼칠 수가 없었다.

동생 아마데우스가 1781년 아버지를 거역하고 성공을 위해 수도 빈행(行)을 결행할 때도 누나 난네를은 아버지에 순종했다. 여자가 일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으니. 결혼과 함께 길겐에 가서 살다가 남편이 죽자 난네를은 1821년 고향 잘츠부르크로 돌아온다. 그리고 음악교사로 생활하며 여생을 마친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빈이 사랑한 천재들>의 '모차르트편'을 쓰면서 못내 난네를이 마음에 걸렸었다.

난네를은 '상트 페테르' 묘지에 영면중이다. 나는 잘츠부르크를 두 번 여행한 적이 있고 이 묘지에도 잠깐 들른 적이 있다.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잘츠부르크를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꼭 난네를 묘를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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