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어쩌다, 부다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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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어쩌다, 부다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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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루미선데이


깊어가는 여름, 우연히 부다페스트가 '훅' 들어왔다. 하나는 부다페스트 시민 1만여 명이 헝가리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반중(反中) 시위를 하는 장면이다. 국회의사당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푸단대 헝가리 캠퍼스 설치 반대'를 주장했고, 이 모습이 외신을 타고 세계로 퍼졌다.

다른 하나는 영화감독 웨스 앤더슨(Wes Anderson)이다. 보통 사람 중에 앤더슨 감독의 대표작을 금방 떠올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영화 팬이라면 다를 것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나도 이 영화를 아주 인상 깊게 본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읽고 나서 한번 더 보고 싶은 책이 있는 것처럼 영화도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렇다.

이 영화를 인상 비평을 한다면 내용보다 색조로 먼저 기억되는 영화다. 영화의 포스터에서부터 전체적인 파스텔톤의 컬러가 잔상(殘像)으로 오래 머무는 작품.

최근에 번역되어 나온 사진집 '우연히, 웨스 앤더슨'. 참, 기발하다. 원제도 똑같다. Accidentally Wes Anderson.

기획 자체가 정말 특별하고 독보적이다. 사진집 제목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 세계 각처에서 우연히 만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파스텔톤과 비슷한 장면들을 찍어 한데 모은 것이다. 사진의 장소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그랜드 부다페스트

 

 


@AccidentallyWesAnderson. 코로나로 인해 외국여행을 못하는 사람들에게 대리 만족과 함께 재미난 동참을 유도하려 만든 미국인 윌리 코발의 인스타그램 계정이다. 이런 장(場)이 생기자 앤더슨 감독의 팬들이 여행을 하다 찍은 영화 분위기와 비슷한 장면들을 그의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이중 200여 장면을 골라 편집한 것이다. 아마존에서 사진집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 중이다. 이 인스타는 현재 140만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덕후가 세계적으로 최소 140만명인 것이다.

영화감독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고마운 데가 또 있을까. 앤더슨 감독은 이 사진집에 서문을 썼다. 월리 코발은 앤더슨 스타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칭적인 선이든, 파스텔 색조든, 완벽한 구도든, 아니면 뭔가 단번에 설명할 수 없는 특이하고 아름다운 것이든,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스타일이 있다."

 

 

 

 

우연히, 웨스 앤더슨 표지

 

사진집의 일부



이 책에는 200여 장면들이 나온다. 북극권인 노르웨이 스발바르제도부터 남극대륙에 걸쳐 다양하다. 평양의 극장 내부 사진도 보인다. 섭섭한(?) 것은 한국의 풍경이 없다는 점.

장소와 외양은 다르지만 어딘가 앤더슨적(的)인 스타일이 느껴지는 장면들. 앤더슨 덕후들은 방구석에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복제품들을 감상하며 당장은 갈 수 없는 그곳을 상상으로 여행한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런 현상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겠다. 저게 뭐라고 비슷한 스타일의 사진을 한데 모아놓고 좋아라 하느냐. 그러나 알고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이것은 현대미술의 특징 중의 하나다. 세상은 이렇게까지 바뀌었다.

일찍이 뉴욕에서 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1928~1987)이 이 개념을 활용해 초대박을 터트렸다. 시뮬라크르(simulacre). 같은 형태가 조금씩 모양을 달리하면서 미세한 차이와 반복으로 무한히 증식하는 것을 시뮬라크르 라고 한다.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스타들의 사진을 앤디 워홀은 실크 스크린 기법을 활용해 색조를 달리해 여러 장을 만들었다. 하나의 오리지널 이미지를 두고 컬러에 변화를 줘 다양한 메시지를 창조한 이가 앤디 워홀이다.

앤더슨적인 장면들은 어느 것 하나 '같은 형태'는 없다. 그러나 필설로 형언하기 힘든 유사한 분위기가 서려 있다. 앤더슨 스타일이다. 앤더슨 덕후들은 여기서 어떤 동질감과 연대의식을 느낀다. 이 사진집은 시뮬라크르의 21세기적 변주다.

 

 

 

도나우 강에서 본 헝가리 국회의사당의 야경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헝가리를 돕자" 이만섭·유재건 의용군 결성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이 도시는, 최근 우리에게 불행한 사고로 각인되었다. 2019년에 있은 헝가리 유람선 침몰사고다. 한국인 25명을 포함해 27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유람선은 장대비가 퍼붓던 밤 경관조명이 켜진 헝가리 국회의사당을 보려고 도나우강을 항해하다 침몰했다.

지금의 50대 이상은 김춘수(金春洙)의 시 한 편을 통해 부다페스트를 처음 접했다. '부다페스트 소녀의 죽음'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 가로수 잎이 하나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환은 / 땅바닥에 /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 내던진 네 죽음은 /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에서 역으로 싹튼 것일까…"

소련의 위성국 헝가리가 공산 독재에 신음하던 1956년 헝가리군이 부다페스트에서 공산당과 소련에 대항하는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부다페스트 혁명이다. 하지만 소련군이 부다페스트에 침공해 탱크와 총칼로 이를 무참히 짓밟는다. 그때 서방 언론에 보도된 한 장의 사진을 접한 시인 김춘수는 자신이 겪은 6·25전쟁의 비극을 되살려 시로 승화시켰다.

1956년 부다페스트 혁명이 벌어졌을 때 이만섭(작고, 전 국회의장 )과 유재건(3선 의원 역임)은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재학생이었다. 소련 공산군의 만행에 피가 끓은 이만섭과 유재건은 학생들을 규합해 '헝가리 자유수호 학도의용군'을 결성했다. 연세대 학생 8명은 국방장관을 찾아가 헝가리에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이 내용이 신문에 실렸다. 의용군 참전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실행되지 못했지만 헝가리 정부는 한국 대학생들의 고귀한 뜻을 잊지 않았다.

헝가리가 자유화된 이후 헝가리 정부는 헝가리혁명 50주년을 맞아 국가적인 행사를 열면서 이만섭과 유재건에게 훈장을 수여 하기로 한다. 훈장 수여식은 2006년 서울 성북구 헝가리 대사관저에서 행해졌다. 나는 그때 이 훈장 수여식을 취재하기 위해 현장에 있었다. 헝가리 대사는 "암울한 시절 한국의 청년 대학생들이 헝가리의 자유를 위해 뜻을 모았다는 점에 대해 헝가리인을 대신해 마음속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인간성을 말살하는 공산주의와 20대 청년의 순결한 정의감에 대해 생각했다.

 

 

 

1956년 가을, 부다페스트 시민들이 공산당에 저항하는 헝가리군을 환영하고 있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글루미 선데이'의 부다페스트

코로나 이전에 '오스트리아~체코~헝가리' 3개국을 도는 패키지 상품이 인기였다. 리무진 버스가 헝가리 국경 안으로 들어서면 여행 가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영화 한 편을 틀어준다.

영화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 1999년에 나온 런닝타임 114분짜리 영화가 다 끝날 즈음이면 리무진 버스는 부다페스트 시내로 진입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도나우강을 건너면서 여행객들은 20세기 부다페스트 역사 속으로 스며든다. '글루미 선데이'는 부다페스트를 만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최상의 인트로다.

1933년, 부다페스트 태생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레조 쉐레스가 헝가리 시인 라즐로 자보의 시 '세상이 끝나가네'에 곡을 붙인 것이 '글루미 선데이'다. 부다페스트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기 전이다. 가사와 선율에 내재한 허무주의적 색채로 인해 이 노래를 듣고 청년의 자살이 잇따랐다. 헝가리와 유럽에서 청년 187명이 이 노래로 인해 자살했다. '헝가리 자살 노래'라는 꼬리표가 붙자 헝가리 정부는 급기야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묶었다.

영화는 노래 '글루미 선데이'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아름다운 여성 일로나를 놓고 레스토랑 사장 자보와 피아니스트 안드라스가 벌이는 삼각관계라는 러브 라인이 삽입되었다. 한 사람 더, 독일인 한스도 등장한다. 나중에 나치 장교의 완장을 차고 나타난 한스는 삼각관계에 극적 긴장감을 더하고 파시스트의 야비함과 비열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에서 자보의 레스토랑으로 나오는 곳이 부다페스트 최고급 식당 군델(Gundel)이다.

나는 2007년 '빈이 사랑한 천재들'을 쓰고나서, 두 번째 도시로 부다페스트와 프라하를 놓고 여러모로 저울질했다. 처음엔 부다페스트를 비중 있게 검토했다. 그 이유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에서 시리즈를 시작했으니 제2의 도시 부다페스트로 가는 게 순리라고 생각해서다. 1867년에 성립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독일어로는 외스터라이히·웅가르제국. 알려진 대로 헝가리는 몽골계 유목민인 마자르족이 건국한 나라다.

도나우강이 유장하게 흐르는 부다페스트는 여러모로 아름다운 도시다. 주변적인 조건은 충족됐다. 문제는 부다페스트에서 독자들과의 접점이 넓은 천재들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 프란츠 리스트가 이곳 태생이긴 해도 어려서부터 음악 교육을 받은 곳은 빈이었고 주요 활동 무대는 독일이었다. 리스트기념관이 있기는 했지만 도시에는 그의 흔적이 많지 않았다.

이중제국 형성 이전에도 빈에는 헝가리인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빈에서 마자르족의 후예들이 집단으로 모여 산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동네가 웅가르 가세(Ungar gasse)다. 헝가리의 독일어가 웅가르.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의, 저 유명한 요한 슈트라우스 기념상이 있는 시민공원과 가깝다.

베토벤은 웅가르 가세 3번지 집에서 1823년 10월부터 8개월간 살았다. 이 집에 살며 베토벤은 9번 교향곡 '합창'을 작곡했다. 베토벤은 청력을 완전히 잃어 소리를 하나도 듣지 못한 상태였다. '합창'은 훗날 유럽연합(EU)의 주제가로 채택되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어쩌다 보니 '글루미 선데이'를 거쳐 베토벤 9번 교향곡까지 흘러왔다. 이 또한 의식의 흐름인가, 아니면 그냥 잡생각인가.

비 오는 날, 빌리 홀리데이가 부르는 '글루미 선데이'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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