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존 라베'와 난징대학살, 그리고 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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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존 라베'와 난징대학살, 그리고 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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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존 라베' 포스터.

난징대학살. Nanjing Massacre.

중일전쟁 기간인 1937년 12월13일 중화민국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한 일본군이 12월 29일까지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학살 사건.

일본은 지금도 난징대학살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공식적으로 인정한 일이 없다. 난징대학살을 고발하는 수십 종의 책이 출판되었고, 여러 편의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왔건만.

2009년에 나온 영화 '존 라베'는 난징대학살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데 좋은 참고 자료다. 그런데 왜 영화 제목이 '존 라베'일까? (독일어 발음은 욘 라베)

이 영화는 대학살의 현장에 있었던 독일 지멘스사 난징지사장 존 라베(John Rabe 1882~1950)의 일기와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사업가 존 라베가 주인공이다. 존 라베의 눈에 비친 참극이다. '중국의 쉰들러'라고 불리는 독일인 존 라베. 그는 어떻게 해서 난징에까지 가게 되었을까.

라베는 1882년 독일 북부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882년이면 독일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세계로 뻗어 나갈 때다. 1871년 보불전쟁 승리와 함께 제2제국을 건설한 독일은 영국·프랑스의 뒤를 이어 해외 식민지 개척에 뛰어들었다. 독일은 중국 대륙에서 칭따오를 조차(租借)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라베는 일찌감치 사업을 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수년간 아프리카의 토고, 카메룬 같은 곳에서 지내며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배웠다.

그가 중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스물여섯 살 때인 1908년. 1910년지멘스사 중국 지사에 입사해 베이징·상하이를 거쳐 난징지사장에 임명된다. 양쯔강을 끼고 있는 난징에서 라베는 수력발전 설비운영 책임을 맡았다.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게 1933년. 이후 독일 성인남녀 대부분이 나치당에 입당 원서를 썼다. 그 역시 난징에서 나치당에 입당했고 난징지역 책임자가 된다.

 

 

1937년 12월 난징 서문 근처의 강가에 버려진 중국인 시체들을 일본병사가 쳐다보고 있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일본군이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수도를 향해 진격해올 때 난징에는 적지 않은 서양인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무역업에 종사하는 사업가였고, 일부는 외교관과 선교사였다. 난징 시내까지 포성이 들리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외국인 대부분이 여객선을 타고 도시를 탈출했다.

11월22일, 일본군이 난징 외곽까지 접근해 중국군과 교전을 벌일 때 난징에는 라베를 포함한 외국인 22명만이 남았다. 라베는 위기에 빠진 중국인들을 모른 체하고 난징을 탈출할 수도 있었지만 고심 끝에 난징에 남기로 한다. 난징 함락은 시간문제. 사업가, 의사, 선교사로 구성된 외국인들은 난징안전지역 설립을 위한 국제위원회를 조직한다. 라베가 국제위원장에 추대된다. 독일이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 기업 지사장으로 권력층과 선이 닿는 라베가 아무래도 대일(對日) 협상에서 유리할 것으로 판단해서다.

국제위원회는 난징대학과 외국 대사관이 몰려 있는 시(市) 서쪽 지역에 난징안전구(南京安全區 The Nanjing Safety Zone)를 설치한다. 일본군은 안전구에 중국군만 숨겨주지 않는다면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12월13일 난징이 일본군에 함락되었을 때 난징에는 피난 가지 못한 중국 민간인 50만명이 남았다.

라베는 베를린 나치사령부의 신임을 활용해 일본군의 만행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쓴다. 영향력이 통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독일어를 하는 자신의 중국인 운전기사가 살해당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라베는 사재(私財)를 털어 안전구에 들어온 중국인들을 지켰다.

 

 

 

 

난징대학살 기간 중 도쿄에서 발행된 신문 기사의 제목. ' 100명 참수 시합의 믿을 수 없는 기록'. '무카이 105, 노다 106 연장전 돌입'이라는 부제가 보인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중국 근무 때부터 일기를 써온 라베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는 일기 분량이 늘어났다. 라베는 일기에 민간인 5만~6만명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연구가들은 16일 동안 학살당한 중국인이 20만~30만명이라고 주장한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라베는 안전지역 책임자의 위치에서 본 것만을 기록했다. 20만~30만명설(說)은 라베가 수집한 자료 외에 일본 기자를 포함한 외국 언론의 보도 등을 종합해 추정한 숫자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는 라베가 안전구를 운용해 중국인 25만명의 생명을 구했다고 주장한다. 난징대학살은 '난징의 강간'으로도 불린다. 일본군은 집집마다 뒤지며 보이는 남자들은 사살했고, 여자들은 강간했다.

1938년 2월 말, 라베는 난징을 떠난다. 샹하이를 거쳐 여객선을 타고 4월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그의 여행 가방에는 일기장, 사진자료, 동영상 등으로 가득했다. 라베는 베를린에서 사진 자료와 동영상을 보여주며 일본이 중국에서 저지르는 만행을 고발하는 강연을 했다. 히틀러에게도 일본군의 만행을 막아달라는 편지를 썼다. 하지만 나치 지휘부는 동맹국을 비판하는 활동을 벌이는 라베에 부담을 느꼈다. 그가 히틀러에게 쓴 편지는 전달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다. 하지만 지멘스 본사가 로비를 벌여 라베는 금방 풀려난다. 난징학살과 관련해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해서는 안된다는 조건으로. 라베는 베를린의 지멘스 본사에서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근무한다.

독일이 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 단죄되면서 그에게 엄혹한 시련이 닥쳤다. 가장 먼저 베를린에 들어온 소련군에 체포되었고, 이어 영국군에 검거되었다. 그는 양쪽으로부터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그의 나치협력 증거는 넘쳐났다. 나치 협력죄로 '취업 자격'이 박탈된다. 그는 4개국이 분할 점령한 베를린에서 영국 관할 구역의 교도소에 수감된다.

연합군은 나치협력자를 대상으로 탈나치화(de-nazification) 작업을 강도 높게 벌였다. 나치 잔재를 뿌리 뽑고 나치의 부활을 차단한다는 조치였다. 그는 '탈나치화' 대상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재산을 거의 다 써버렸다. 직장도 잃고 모아둔 돈도 다 날린 그는 가족과 함께 원룸 아파트에 살며 중국에서 가져온 미술품 판매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갔다.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 부족에 시달렸다. 1946년 6월, 그는 최종적으로 '탈나치' 판정을 받고 자유인의 신분이 된다.

전쟁이 끝나자 중화민국의 난징 시민들은 생명의 은인인 라베를 찾아 나섰다. 수소문 끝에 라베가 베를린에서 곤궁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난징시는 모금 운동을 벌인다. 폐허 속에서 2000달러(현재 가치 2만1000달러)가 모금되었다. 난징 시장은 이 돈을 들고 스위스를 거쳐 베를린으로 들어가 라베 가족에 식료품과 생필품을 전달했다. 라베는 난징 시민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이후 난징시는 매월 라베 가족에 식료품과 생필품 꾸러미를 보내주었다. 이런 관계는 1948년 동독이 공산화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50년 1월, 라베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눈을 감았다. 그의 시신은 빌헬름황제 기념묘지에 안장되었다. 라베의 일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이후. 난징대학살을 기록한 라베의 일기가 출간되었고, 곧이어 영국과 미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난징의 선한 독일인'(The Good German of Nanjing, 영국), '난징의 선한 사람'(The Good Man of Nanjing, 미국)이란 제목으로.

 

 

 

 

존 라베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존 라베의 이야기를 다룬 극영화는 지금까지 모두 4편이 나왔다. 물론 난징대학살을 포괄적으로 다룬 영화는 장예모(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한 '진링의 13소녀'를 포함해 10편이 넘는다.

1997년 중국 정부는 베를린의 라베 묘지를 난징 학살추모지에 옮겨왔다. 2005년 난징시는 라베가 살았던 난징 자택을 원상 복구해 현재 존 라베와 국제안전구 기념관으로 일반에 개방한다.

나치 추종자였던 존 라베가 목숨을 걸고 중국인의 생명을 구한 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까. 얼핏 모순된 행동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라베가 중국을 떠난 것은 1938년 2월이다. 히틀러가 2차세계대전을 일으키기 1년 8개월 전이다. 영화에서 라베가 히틀러에게 일본군의 학살을 막아달라는 편지를 쓰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으로 미뤄 나치당원 라베는 히틀러가 편지를 읽게 되면 일본군의 만행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정치의 세계를 모르는 순진한 사업가여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거짓선동에 속아 나치의 선전을 곧이곧대로 믿었기 때문일까.

분명한 사실은 나치당원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학살 앞에서 본성에 내재한 휴머니즘이 발동했고, 그 양심의 소리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실천에 옮겼다는 점이다.

독일이 패망할 때까지 라베는 히틀러가 저지른 홀로코스트를 정확히 알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에 번역 출간된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이 생각의 단서를 제공한다. 나치 시대 독일을 여행한 영국·미국인들은 한결같이 히틀러와 독일인을 찬미한다. 1937년에만 미국인 방문자가 50만명에 이르렀다. 외국여행자들은 보이는 것만 보고 믿었던 것이다.

 

 

 

 

 

베를린올림픽 기간 중 독일 관중들이 메달 시상식에서 나치 깃발이 올라가자 일제히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 있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라베의 나치당 가입과 활동을 어떻게 봐야 할까. 히틀러 집권 이후 독일인들은 종일 라디오를 통해 선전방송을 들었다. 그들은 세뇌인 줄도 모르고 세뇌를 당했다. 괴벨스의 거짓선동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결과 독일 성인들의 99% 이상이 나치당에 가입했으며, 청소년들 역시 히틀러유겐트에 참여했다.

사업가 오스카르 쉰들러(1908~1974) 역시 나치당원이었다. 나치당원이 아니면 사업을 하는 게 불가능했으니까. '친나치' 쉰들러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기 직전의 유대인 1200명을 구했다.

영화로도 나온 '피아니스트'의 실제 주인공 블라디슬라브 스필만.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바르샤바 게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피아니스트. 그를 살려준 이는 초등학교 교사 출신의 교양 있는 나치장교 빌름 호젠펠트였다. 소돔의 무리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이 비쳤다. 어떤 전체주의 폭력도 양심의 소리를 누르지는 못한다는 것을 '피아니스트'는 보여준다.

 

 

 

 

현재 기념관으로 운영중인 존 라베의 저택. 이 집은 난징대학살 기간에 난징안전지구에 있었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중국은 왜 라베의 묘비를 베를린에서 난징으로 옮기고, 살던 집을 복원해 기념관으로 만들었을까. 전체주의 만행 앞에서 피어난 양심의 소리를 기억하자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지금 시진핑의 중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어떤가. 공산당 일당 독재인 중국에는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없다. 모든 중국인은 공산당의 유리감시망 속에 들어있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경고한 전체주의가 지금 바다 건너에서 버젓이 벌어진다. 급기야 꽃미남 연예인들의 방송 출연 제한까지 나온다. MZ세대는 "잘생김을 (추구하는걸) 어찌 막냐?"고 그런 중국에 코웃음을 친다. 알려진 대로, 세계에서 '오징어게임'을 볼 수 없는 나라는 중국과 북조선뿐이다.

개인의 사적 영역까지 통제하는 중국에서 인류 화합의 축제인 동계올림픽이 열린다. 벌써 그리스에서 베이징동계올림픽 성화가 채화되었다. 히틀러는 전체주의 독재를 완성하는 선전장으로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활용했다. 가장, 극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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