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날씨, 몽골제국의 운명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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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날씨, 몽골제국의 운명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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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라쉬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세계인문여행' 91회는 '어쩌다, 부다페스트'였다.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와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냈다. 매주 금요일 오전에 연재물을 페이스북에 올린다. 이어 페북을 하지 않거나 계정만 열어놓고 있는 지인들과 게시물을 카톡으로 공유한다.

그러면 여러 지인들이 페북 댓글이나 카톡으로 짧은 소감을 보내오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지적 쾌감을 느낀다. 집단 지성을 실감한다.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지인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지식이나 경험을 들려준다. 도저히 수첩에 메모하지 않을 수 없다. 그중 한 사람이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동영 교수다. '세계인문여행' 91회를 읽고 이런 카톡을 보내왔다.

'10여 년 전 학회 일로 부다페스트에 간 적이 있습니다. 몽골군이 그곳까지 이르러 엄청난 공포를 남겼다는 사실에 한번, 그리고 굴라쉬 수프가 우리 육개장과 너무 비슷하다는 점에 놀랐지요…아주 먼 곳인데 왠지 여러 가지로 닿아있는 느낌이 드는 곳입니다~ 굴라쉬 수프 먹고 싶네요 ^^ 감사합니다!'

나는 이 카톡을 접하고 수년 전 신문기사를 읽고 메모해놓은 것을 떠올렸다. 그 메모를 잘만 '쿠킹'(Cooking)하면 연재물 한 편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메모 폴더함에 넣어두고 심심할 때마다 뚫어지게 쳐다보곤 했다. 그런데 이 카톡이 그 메모에 불을 지폈다.

13세기 몽골군이 중부 유럽인 헝가리 초원까지 진출했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역사적 사실. 서유럽으로 가는 관문인 오스트리아 빈이 도나우강만 건너면 눈앞에 펼쳐졌다.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빈을 무너뜨리면 서유럽 정복은 식은 죽 먹기였다.

몽골 기병은 거침이 없었다. 유럽의 기독교 세계는 헝가리 대평원까지 쳐들어왔다는 몽골 기병 소식을 바람결에 듣고 있었다. 그들은 동쪽에서 언제라도 들려올 것만 같은 몽골군의 말발굽 소리를 상상하며 공포에 떨었다. 이교도 야만족이 쳐들어오면….

 

 

헝가리 대평원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때는 1241년 3월.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은 제2대 칸(Khan)인 오고타이가 다스리고 있었다. 서방 원정 사령관은 오고타이의 조카인 바투. 러시아와 폴란드를 정복하고 헝가리 대평원까지 진출한 몽골군은 헝가리 왕국의 도읍지 에스테르곰을 초토화시켰다. 헝가리 왕은 도나우강 건너편 언덕 부다(Buda)로 수도를 옮기고 성을 세웠다. 도나우강 동쪽의 평지인 페스트(pest) 지역은 몽골군 세상. 헝가리 왕은 언덕 위에 최후 방어선을 치고 지구전(持久戰)에 돌입했다. 그러나 해발 167m 높이의 성채도 몽골군에게는 난공불락은 아니었다. 공성전(攻城戰) 전술에 능한 몽골군 앞에 헝가리 왕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여기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1242년 3월, 날씨가 풀리자 몽골군이 갑작스레 퇴각을 결정해 러시아 킵차크 칸국(汗國)으로 철수한 것이다. 헝가리 왕국은 기사회생했다. 이 뜻밖의 철군에 서유럽 전체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도나우강에서 본 부다 성 지구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왜 몽골군은 갑자기 철수했을까. 세계사 최대의 미스터리! 이에 대한 오래된 정설은 다음과 같다. 1241년 12월 오고타이 칸이 급서하면서 몽골의 수도에서 후계를 놓고 권력투쟁이 벌어지자 바투가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 추론에는 여러 가지 허점이 있었다. 그중 하나. 오고타이의 사망 소식이 3개월 만에 헝가리 초원까지 전달되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말이 낮과 밤을 쉬지 않고 달려도 5개월이 걸리는 거리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역사학자들이 영구미제로 남겨놓은 것을 과학자들이 파고들었다. '나이테 기후학'(tree-ring climatology)이라는 학문이 있다. 수목의 나이테를 통해 당시의 기후환경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과학자들은 목재를 통해 1238년~1242년의 헝가리 초원의 기후변화를 연구했다. 건조한 기후에서는 나이테의 간격이 좁아진다. 과학자들은 1238년~1241년 사이에 헝가리 초원이 춥고 건조한 날씨가 지속하였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런데 1242년에 기온이 올라가고 비가 많이 내리면서 드넓은 대평원이 습지와 늪지로 바뀌었다. 또한 고온다습한 기후는 농작물의 부패화를 가속했다. 전광석화의 기동성이 생명인 몽골군으로서는 난감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주요 이동로가 물바다로 변하기 직전 바투 사령관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결국 몽골군은 상대적으로 기후가 건조한 지역인 킵차크 한국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추론이다.

서유럽은 기상 변화로 몽골군의 공포에서 해방되었지만 몽골의 러시아 지배는 1480년까지 240년간이나 지속한다. 몽골 지배의 장기화가 러시아의 후진성을 심화시켰다는 이유에서 역사가들은 훗날 이를 '타타르의 멍에'라고 일컬었다.

 

 

 

1274년과 1281년의 몽골군의 일본 원정 개념도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하늘이 두 번 구한 일본

일본이 서양 세계에 처음 알려진 것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통해서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인으로부터 풍문으로 들은 섬나라 지팡구 이야기를 살짝 언급했다. 전해 들은 이야기를 쓰다 보니 사실과 다르게 와전된 부분이 있었다. 금이 많이 난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13세기 일본은 몽골의 침략을 받는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이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이 몽골제국의 황제에 오른 게 1260년. 쿠빌라이칸은 1271년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국호를 원(元)으로 정한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도달한 게 바로 쿠빌라이칸의 원 나라 때.

몽골은 동(東)으로는 유라시아 대륙 끄트머리 고려, 서쪽으로는 러시아까지 정복한 상태였다. 중국 대륙 남부로 쫓겨간 남송(南宋) 정복은 시간문제였다.

쿠빌라이칸은 일본을 먼저 제국에 복속시키는 전략을 세운다. 하지만 쿠빌라이칸의 기대와는 달리 일본은 '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기분이 상한 쿠빌라이칸은 일본 원정(遠征)을 결심한다.

당시 일본은 가마쿠라(鐮倉1185~1333) 막부 시대. 무사가 권력을 잡은 최초의 막부 시대가 일본을 통치하고 있었다.

몽골은 고려에 일본 침공을 위한 준비를 하달했다. 고려가 건조한 전함 900척에 고려군 1만5000명, 몽골군 2만5000명 나눠탄 '여몽연합군'이 탄생했다. 헝가리 초원에서 철수한 지 32년만이다.

1274년 여몽연합함대는 부산과 마산에서 일본을 향해 항진한다. 몽골군은 고려군의 안내를 받아 규슈섬 하카타(博多)만에 닻을 내렸다. 연합군은 육지로 상륙해 일본군을 격파하며 주변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처음으로 외침을 당한 일본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여몽연합함대의 사령관은 적군의 반격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전투병을 함대로 불러들인다. 장시간의 이동과 전투에 지친 병사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한 것이다.

 

 

 

1274년 여몽연합함대가 정박하던중 태풍을 만난 하카타 만. 조성관 작가 제공

 

 


문제는 다음날 새벽에 벌어졌다. 하루 만에 태풍이 들이닥쳐 하카타만을 강타했다. 태풍은 밤새 하카타만을 할퀴고 지나갔다. 정박해 있던 군함 200여 척이 아비규환 속에 침몰했고 병사들이 폭풍우 속에 사라졌다. 몽골군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인은 신이 태풍을 보내줬다고 믿었고, 이 태풍을 '가미카제'(神風)라고 불렀다.

쿠빌라이칸은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내 순순히 항복하라고 겁박했다. 하지만 일본은 1·2차 사신단을 모조리 처형했다. 화가 날 대로 난 쿠빌라이칸은 태풍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2차 일본 원정을 계획한다. 1281년, 1차보다 훨씬 규모가 큰 2차 여몽연합군이 구성됐다.

가마쿠라 막부는 몽골군이 다시 침략할 것을 예상했다. 두 번 다시 당하지 않겠다. 철저하게 대비한다. 가마쿠라 막부는 전국에서 무사들을 소집해 하카타만을 포함해 북규슈 일대에 포진시켰다. 몽골군은 이번에는 하카타만을 피했다. 규슈섬 북서쪽 다카시마(鷹島)에 정박한 뒤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연합군의 예상 가능한 침투로에 매복했다. 연합군은 상륙하자마자 일본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정박 중인 함대로 몸을 피해야 했다. 오도 가도 못하며 쩔쩔매고 있을 때 또 한 번 태풍이 닥쳤다. 두 번째 가미카제(神風)!

몽골제국은 두 번의 일본 원정 실패로 국고에 큰 타격을 입는다. 두 번씩이나 원치 않는 전쟁에 끌려들어 간 고려도 사정은 비슷했다. 일본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비록 적을 패퇴시키긴 했지만 손에 쥔 전리품이 아무것도 없었다. 고용한 무사들에게 나눠줄 게 없었다. 무사들의 불만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가마쿠라 막부 정권은 힘을 잃기 시작했고, 50년 뒤 몰락한다.

1차 원정 때 태풍이 하카타만으로 북상하지 않았다면 일본은 몽골군에 정복당해 몽골의 속령이 되었을 것이다. 하카타만에는 안개가 자주 낀다. 그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고려인들의 원혼(冤魂)인가.

하카타만을 끼고 있는 도시가 후쿠오카(福崗)다. 일본프로야구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연고지다. 하카타만 바로 옆에는 후쿠오카 구치소가 있다. 이 구치소에서는 하카타만에서 끼룩거리는 갈매기 소리가 요란하다. 매년 2월16일이 되면 일단의 한국인과 일본인이 구치소를 찾는다. 1945년 2월16일 이 구치소에서 눈을 감은 스물일곱 청년 윤동주를 기리기 위해서다.

굴라쉬 수프가 헝가리 대평원에서 말 달리던 몽골군을 소환했다. 헝가리는 아시아계 유목민인 마자르족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 헝가리 대평원의 너비는 4만㎢가 넘는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 마자르족은 이곳에서 소 떼를 방목하며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았다. 이들이 들판에 솥을 걸어놓고 소고기, 감자, 야채를 집어넣어 뭉근하게 끓인 음식이 굴라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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